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예 아리아인 (문단 편집) === 대만인 === 대만이 포함된 것은 남아프리카와 대만의 중요한 관계 때문이었다. 1979년까지 대만이 남아프리카의 5대 교역국이 되었다.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한 뒤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중국 민족주의자들을 계속 지지하자 두 나라 관계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면서 비슷한 처지에 동변상련하여 매우 가까워 졌다. 단순히 관계가 좋은 수준이 아니라 '''대만인은 아예 공식적으로 백인으로 인정받았다.''' 외교적 고립이 심했던 대만은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남아공과 수교를 했고, 남아공은 이런 대만을 배려해서 대만인을 공식 백인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 대륙 출신의 본토 중국인은 컬러드로 인정해서 차별 대상이었다고 한다. 사실 화교유입은 19세기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청나라 멸망-중화민국 수립-중국 공산화를 거치면서 여러번 국체가 바뀌었는데 남아공은 물론이고 정착한 화교들의 반공정신이 투철한 터라 유색인종 중 가장 대접을 받았다. 거기다 남아공에 진출한 대만 사업가들은 상대적으로 값싼 흑인 노동력을 제공받았다.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자 대만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와 함께 중국, 일본, 한국 등 다른 아시아 기업들이 남아공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새로 정권을 잡은 흑인들은 과거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인정한데다 자신들에게 갑질을 일삼았던 대만인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 수교국 하나라도 아쉬웠던 대만은 경제 지원 등의 조건을 걸며 단교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반대로 이제 고립에서 벗어나 하나도 아쉬울 게 없었던 남아공은 1998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다.[* 단교 선언은 1996년 11월에 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실제 단교가 이뤄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여담으로 단교가 지연되는 도중에 대만에서 이와 관련된 엄청난 사건이 있었는데, 자세한 것은 [[바이샤오옌 사건|항목 참조]].] 그래도 이런 역사가 있어 현재 남아공 토착 화교들은 상당수가 대만 출신이라는 정체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